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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서안 화청지,진시황릉,진시황지하궁전 - 20110803

나의 정원 2011. 8. 11. 00:15

                

                 화청지(華淸池)-당 화청궁의 온천지이다.

                 관중 여산 서북 기슭에 있는 온천지로서 진시황 때 돌을 깎아 집을 만들어 명신(名神)들의 온천지가 되었다고 한다.
                 당 천보원년(742) 현종은 못을 만들어 대대적으로 보수하였고,
    못이 화청궁안에 있기 때문에 화청지라고 명명하였다.

                 황제의 욕탕인 구룡전(九龍殿) 연화탕과 양귀비에게 하사한 욕탕인 해당탕(海棠湯) 등이 있다.

                 화청궁의 전체 구조는 6문(門), 10전(殿), 4루(樓), 3각(閣), 5탕(湯)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가 엮인 화청지는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당나라 황실 원림이다.

양귀비(楊貴妃, 719년 ~ 756년)

당 현종 (당나라 제6대 황제)의 후궁이자, 며느리이다.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고아 출신으로 양씨 가문에 양녀가 되었다. 양아버지의 임지(任地)인 쓰촨성[四川省]에서 자랐다.
양귀비의 이름은 양옥환(楊玉環)이며,
735년 현종과 무혜비(武惠妃)의 아들인 제18왕자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妃)로 17세 때 궁궐에 들어온다.

뛰어난 시와 노래에 능한 예술가였던 그는 740년 환관 고력사의 소개로 만난 현종의 눈에 들게 된다.

현종은 그녀를 화산의 도사로 출가시켜 수왕에게서 빼내고, 궁안에 도교사원 태진궁(太眞宮)을 짓고 다시 이곳을 관리하는 여관(女冠)으로 불러 들인다.

이때 양귀비의 나이 22세, 현종은 57세였다.
745년 양옥환이 27세에 귀비가 되면서, 당나라는 서서히 끝자락을 달리게 된다.

당 현종 초기에는 개원의 치를 이룩할 정도로 어진 정치를 하였지만, 양귀비의 등장이후 양귀비 일가의 전횡이 시작되면서, 당나라는 점점 힘을 잃게 된다.

양귀비의 세 오빠에게 모두 높은 벼슬을 주었고, 세명의 언니들 모두를 국부인에 책명할 정도로 그녀를 총애하였다.

그 중 양귀비의 사촌 오빠인 양소는 현종에게 '국충'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승상의 지위에까지 올라 국정을 전횡한 인물로 환관 고력사와 담합하여 당 현종을 정치에서 관심을 멀어지게 한다.
747년 절도사 안녹산이 등장하여, 양귀비는 그와 친해지게 된다.

새로운 권력자의 등장에 위기를 느낀 양국충은 견제를 하게 되는데, 이것은 안사의 난이 일어나 당나라가 멸망하는 원인이 된다.

 

 

 

 

구룡 온천과 여산  - 밤이면 이곳을 무대로 '장한가' 공연이 펼쳐진다.

 

 

화청지 곳곳에서 볼수있는 서안의 꽃 '석류'는  2300년의 재배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한무제 당시 실크로드를 통하여 들여왔다고 한다.

    400년된 석류 나무가 보인다.

 

화청궁 담에 새진 양귀비와 당현종의 사랑을 노래한  모택동 친필의  "장한가"  관광객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관풍루- 양귀비가 목욕 후 누각에 앉아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자연 바람에 머리칼을 말리던 곳이라 한다.

 

양귀비조각상 -  양귀비는 키 155cm, 몸무게  65kg 정도로 얼굴도  몸매도 통통하였단다

                          이 양귀비 입욕 조각상은 광동성 연산현의 흰색 대리석으로 조각한 높이 3m의 입체 조각상으로

                          몸에 여우가죽을 걸치고 육체를 반쯤 노출시킨 양귀비가 머리를 숙여 요염한 자태로 천천히 욕탕에 들어가는 모습이라 한다.  

 

 

귀비지(贵妃池)는 목욕탕의 모양이 해당화와 같다는 의미에서 해당탕(海棠汤)이라고 한다.

양귀비의 생일날에 당현종이 양귀비한테 선물한 독탕이다.  

이 탕 안에는 바닥을 다 덮을 크기의 백옥(白玉)이 놓여 있어, 더운 온천수가 차가운 옥에 닿아 식으면서 서서히 탕으로 올라와 목욕하기 알맞게 된다.

 

             

연화탕은 목욕탕의 모양과 남아있는 주추돌의 모양이 연꽃과 비슷하다 하여 붙이 이름이다.

안록산이 당현종과 양귀비한테 선물한 부부탕이라고 한다.

안록산이 연화탕의 각 기둥에 동물의 모양을 새겨 바쳤다고 하는데, 어느 날 현종이 목욕하다 보니, 물에 비친 모습이 너무 흉측해 시종들을 시켜 다 깎아내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다는 아이러니하다.

 

성진탕(星辰湯)은 노천에서 하늘과 달이 다 보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태종 이세민이 사용하던 탕이다.

 다른 탕과는 달리 가로로 길고 군데군데 모서리가 들어가 있는데, 그 이유는 목욕 시중을 드는 궁녀들이 서 있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밖에 태자가 쓰던 태자탕(太子湯), 궁녀들이 사용하던 상식탕(尙食湯), 사절단을 위해 준비한 별실,

1936년 12월에 일어난 서안사변 당시 장개석이 감금되어 있던 오간청(五間廳) 등이 있다.

 

                  화청지의 전각  - 전각은 최근에 지어진 것이고 뒤에 보이는 산은 여산이다.

 

백거이의 "장한가"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연리지(連理枝)가 되어.. 주제로 하고  여산을 배경으로 화청지 야외무대에서 펼쳐지는 가무오페라는  정말은 볼만하다.

비익조(比翼鳥)는 암수가 각각 눈하나와 날개 하나씩만 갖고 있어서 두마리가 한몸이 되어야만 날아갈 수 있다는 새이고,

연리지(連理枝)는 두개의 가지가 서로 얽혀 하나로 된 나무를 말한단다.

 

               진 시황제( 秦始皇帝)

                기원전 259년 1월 ~ 기원전 210년 음력 9월 10일)는 진나라의 제31대 왕이며, 중국 최초의 황제이다.

                이름은 영정(嬴政)이며, 조나라에서 출생하였기에 조정(趙政)이라고도 한다.

                진 장양왕 영자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당시 세도가 대단하던 조나라의 상인 출신의 승상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불로불사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대규모의 문화탄압사건인 분서갱유사건을 일으켜 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였고 전국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 중국 왕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전근대의 중국에서는 특히 유학 관료들에 의하여 폭군이라는 비판을 계속 받았으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 이후부터 시황제의 진취성과 개척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진시황릉 - 우측 멀리보이는 야산만큼 큰것이 황릉이다. 

                                 37년에 걸쳐 70명이 동원돼 만들어진 세계 최대의 능 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약 76m이다.  

                                능은 장방형의 두겹의 담장으로 싸인 능원의 남쪽에 있으며, 안쪽 담과 바깥 담의 사변 길이는 각각 2,525.4m 6,294m이다.

                                수은층이 있어 함부로 도굴이나 발굴도 할 수가 없 으며 그의 가족 4700명이 함께 매장되어 있단다.

 

 

 

 

 

 

 

 

 

 

 

진시황 지하궁전 -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고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진황릉의 내부를 가상으로 꾸며놓은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