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문이란 사찰에 들어갈 때 가장 먼저 통과하는 문이다. 최소한 네 개의 기둥이 서야 일정한 면적을 가지는 건물이 이루어지지만 안팎이 없는 두 개의 기둥만으로 세워진 문이어서 일주문(一柱門)이라 불린다. |
관음보살상 - 길상사 개산(開山) 당시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가 만들어 봉안한 석상. 종교간의 화해의 염원이 담긴 관음상이다.
범종각
극락전- 아미타부처님을 봉안한 길상사의 본법당. 다른 절에서는 아미타전, 미타전, 무량수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길상화 공덕비
스님들의 처소
길상화 김영한님(1916-1999)은 일제치하에 태어나 성장하였고,
16살의 나이에
사라져가는 한국 전통음악과 가무의 전습을 위하여 조선권번을 세워
불우한 인재들에게 고전 궁중 아악과 가무 일체를 가르친 하규일 선생님의 문하에서
진향이라는 이름을 받아 기생으로 입문하였다.
한때 시인 백석으로부터 자야(子夜)라는 아명으로 불리었던 그녀는,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뒤에 몇 편의 수필과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하규일 선생 약전], [내 사랑 백석]등의 저술을 내기도 했다.
일찍이 그녀는 바위사이 골짜기에 맑은 물이 흐르는 배밭골을 사들여
잠깐 청암장이라는 한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는데,
이곳은 뒤에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제 3공화국 시절국내 3대 요정의 하나였던 대원각이 되었다.
길상화님은 노년에 법정스님의[무소유]를 읽고 감명 받아
스님을 친견한 뒤 생애의 높고 아름다운 회향을 생각하고,
당시 시가 1000억 원이 넘는 대원각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 주시기를 청하였다.
그 후 10년에 걸쳐 사양하시는 스님께 받아 주시기를 거듭 청하여 결국,
1995년 그 뜻을 이루게 된다.
1997년 12월 14일 대원각이 길상사가 되던 날,
그 아름다운 법석에서 그녀는
법정스님으로부터 그저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만을 받았고,
7천여평 절터와 전각 모두를 보시하는 그녀의 바람은 단하나,
이곳이 시민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 되어
그들 모두가 고뇌의 마음을 쉴 수 있는 곳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 날 그녀는 수천의 대중 앞에서 단 두어 마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간결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진실하게 울려나오는 그녀의 음성에는
곡절 많은 그녀 인생의 슬픔을 넘어선 위대한 비원이 담겨 있었다.
1999년 11월 14일 그녀는 육신의 옷을 벗었다.
하루 전날 그녀는 목욕재계하고 절에 와서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생애 마지막 밤을 묵었으며,
다비 후 그녀의 유골은 49재 후 유언대로 첫눈이 도량을 순백으로 장엄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바지에 뿌려졌다.
출처 길상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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