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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방사, 주상절리, 이중섭 거리 (제주도 서귀포시) - 20140928

나의 정원 2014. 10. 1. 18:35

 

산방사

 

산방산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있는 산이다.

'산방(山房)'이라는 말은 굴이 있는 산을 뜻한다.

 높이는 해발 345m이며,

 남쪽 해발 150m 쯤에 해식동굴이 있어서 산방산이라 이름을 지었다.

 대한민국의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사계리 해안가에서 용머리 퇴적층과 이어져 있는 조면암 형질의 종모양의 종상 화산체이다.

  산 자체가 거대한 용암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산방산은 신생대제3기에 화산회층 및 화산사층을 뚫고 해중에서부터 분출하면서

 주변 지역과 함께 서서히 융기하여 현재와 같은 산 모양을 이루었다고 전해지는데

 백록담과 산방산은 그 생성 과정이나 시기가 전혀 다르지만 한라산 정상의 분화구와 둘레가 같고,

산방산의 암질과 백록담 외벽(남서벽)의 암질이 같은 조면암질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산방산에 있는 산방굴은 100여 평쯤 되는 동굴 안에 부처를 모시고 있어 산방굴사 라고도 칭한다.

굴 내부 천장의 암벽 사이에서 떨어지는 물은 산방산을 지키는 여신 산방덕(山房德)이 흘리는 눈물이라는 전설도 있다.

남쪽 해안에 있는 용머리 해안은 화산회층이 해식을 받아 특이한 경관을 이루고 있어서,

 하멜(Hamel)의 표류기념탑과 함께 새로운 관광지가 되고 있다.

 

전설에는

옛날 500 장군이 있었는데

이들은 제주섬을 만든 설문대할망의 아들들로 주로 한라산에서 사냥을 하면서 살아나갔다.

하루는 500 장군의 맏형이 사냥이 제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난 나머지 허공에다 대고 활시위를 당겨 분을 풀었다.

그런데 그 화살이 하늘을 꿰뚫고 날아가 옥황상제의 옆구리를 건드리고 말았다.

크게 노한 옥황상제가 홧김에 한라산 정상에 바위 산을 뽑아 던져 버렸는데,

뽑힌 자리에 생긴것이 백록담이고

 뽑아던진 암봉이 날아가 사계리 마을 뒤편에 떨어졌는데 이게 바로 산방산이라 한다.

 

 

 

 

 

 

 

 

 

 

 

 

 

 

 

주상절리

 

막혔던 가슴이 탁 트이도록 시원스레 부서지는 파도와

신이 다듬은 듯 정교하게 겹겹이 쌓은 검붉은 육각형의 돌기둥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중문관광단지 동부지역 해안가의 주상절리대는

 자연의 위대함과 절묘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천혜의 자원으로 천연기념물 제443호로 지정되어 있다.
주상절리대 앞에 서면 새하얗게 부서지는 포말 속에 석수장이의 애달픈 사연이라도 금세 실려 오는 듯 한데,

 파도가 심하게 일 때는 높이 20미터 이상 용솟음 치는 장관을 연출한다.

상큼한 바다 내음을 맡으며 천혜의 절경과 함께 하는 테마여행지로 각광 받으면서 여행객이 계속 늘고 있다.
주상절리란 주로 현무암질 용암류에 나타나는 기둥모양의 수직절리로서

 다각형(보통은 4~6각형)이며,

두꺼운 용암(약 섭씨 1100도)이 화구로부터 흘러나와 급격히 식으면서 발생하는 수축작용의 결과로서 형성된다고 하는데

 이곳의 주상절리는 높이가 30~40m, 폭이 약 1km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규모면에서 최대이다.
지질학적으로는 주상절리지만

행정구역으로는 서귀포시 중문동이며 이곳의 옛이름인 '지삿개'를 살려 '지삿개바위'로 부른다.

 

 

 

 

 

 

 

 

중문 관광단지

 

 

 

이중섭거리

이중섭(李仲燮, 1916년 4월 10일~1956년 9월 6일)은 대한민국서양화가이다. 호는 대향(大鄕)

제국 미술 학교에 입학했다가 동경 분카학원(문화학원)으로 옮겨 졸업했다.

1945년 고향인 북한에 돌아왔다.

원산에서 일본 여자 이남덕{李南德, 본명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과 결혼했다.

한국전쟁 때 월남해서 부산, 통영, 제주도 등을 다니면서 살았다.

이중섭은 그림재료를 살 돈이 없어서, 담배곽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극심한 어려움에 시달렸는데,

이 때문에 1952년 부인이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넘어갔다.

이후 그들의 만남은 이중섭이 부두노동으로 번 돈으로 일본의 처가집을 방문하여 한 차례 더 있었을 뿐이다.

정부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부산, 대구, 통영, 진주, 서울 등을 떠돌며 가난 속에서도 창작에 매달렸다.

1955년 친구들의 도움으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시회를 미도파 백화점에서 열었다.

하지만,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이다가 1956년 간염으로 적십자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친구들이 수소문해서 찾아오니 이미 시체와 밀린 병원비 청구서만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제주도 서귀포시에서는 1951년 이중섭 가족이 살던 집을 개조해 이중섭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 주변으로 이중섭 거리를 조성하였다.

매년 9월에는 이 거리에서 이중섭 예술제를 한다.

2007년 3월 6일에는 이중섭을 추모하는 음반인 《그 사내 이중섭》이 발매되기도 하였다.

1978년 은관문화훈장(2등급,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