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그림,작품들..

프리다 칼로(Frida Kahlo)

나의 정원 2011. 4. 3. 22:58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피어난 예술

 

                                                        글. 이일수<하나코 갤러리 대표>

 

 

몇 달 전 프리다 칼로의 작품 몇 점이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듣던 순간, 

나 스스로  놀랄 정도로  가슴이 쿵 떨어지는 전율과 함께 가슴이 울렁울렁 뛰기 시작했다.

현재 덕수궁 미술관에서 그녀의 작품은 남편 디에고 리베라 작품과 다른 여러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 작품과  함께

전시되고 있는데, 그 전시회 관람 날짜를 선뜻 잡지 못할 정도로 가슴이 먹먹하다.

나는 8년전 우연히 들른 대형서점의 예술코너에서 미술관련 여러 책들을 이것저것 뒤적이던 중, 

프리다 칼로의 인생과 작품을 만났다.

그 이후로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와 행동에 큰 변화가 왔다.

이것은  내가 예술이나 예술가들을 다른 시각으로 만나는 계기가 되었으며, 

예술서 작가의 나, 갤러리 관장으로서의 나가 아닌, 한 여자로서의 나를  사랑하게 하였다.

이처럼  프리다 칼로는 예술가이기 전에 멋진  여인이다.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듯이, 한 예술가의 삶과 그림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은 것이다. 

프리다 칼로, 그닥 환영받지 못한 탄생에서 부터 1954년 47세에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그야말로 생존과의 처절한 싸움이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그 처절한 싸움에서 그녀는 예술로 당당하게 이겨낸다.

이런 프리다 칼로의 자서전적 그림들은 녹록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애써 꽉 다물고 있던  서러운 울음을 토해내게 하고, 또 다시 일어서도록 큰 위안을 주기도 한다.

이 땅의 어머니이고, 딸인  여자들에게는 더욱 더 ...

프리다 칼로에 대해서 기록하고자 하는데,

이것은 그녀의 작품에 대한 분석이 아닌, 그녀의 삶 자체에 대한 것이다. 

 

 

         <부서진 기둥>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두 번의 큰 사고가 있었다.

첫 번째 사고는 평생을 신체적 장애를 안고 살게 된 버스와 전차의 충돌 사고이고,

두 번째 사고는 그녀의 신체적 고통보다 더한 정신적 고통을 준 남편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평생 짊어 지고 가야 하는 신체적 고통과 디에고 리베라와의 관계 속에서

정신적 고통이 그녀 그림의 모든것이  된다.

이것은 그 어떤 영화보다도 슬픈 인생 스토리이다.

 

프리다 칼로는1907년 7월6일 멕시코시티 교외의 코요야칸에서

독일출신의 유대인 사진사인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와 스페인계 멕시코 혼혈인 어머니 마틸데 칼데론 사이에

셋째 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멕시코 혁명이 발발한 1910년 생이라고 말하고는 했는데,

공산주의자로서 멕시코 혁명기우와 함께 태어났음을 강조한 것이다.

  

 

 

 <나의 탄생> *팝가수 마돈나가 거액에 구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의 어머니가 멕시코 혁명 당시 농민 지도자였던 자파의 부하들을 보살펴 준 것을 계기로

멕시코 청년 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스탈린 주의자로 살았다.

아버지는 디아스 시절 관공서의 사진사였으나 멕시코 혁명으로  일자리를 잃고,

사진관에서 영성체를 받는 여인들이나 신혼 부부의 사진을 찍어주며 살았다. 

간질을 앓고 있던 아버지에게 프리다는 지극히 헌신적이었으며, 아버지 역시 프리다를 매우 사랑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남편이 사실상 실직 상태에 있었고, 잇다른 임신으로 지쳐있어 프리다에게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어린 프리다는 이런 어머니를 '나의 주인님'이라고 불렀으며,

어머니와 보내는 시간보다는 유모와 함께 보내며 외로운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유모와 나>

 

 

1913년, 6세의 프리다는 소아마비에 걸리게되어 9개월이나 방에 갇힌 채로 생활했으며,

오른쪽 다리는 영원히 불구가 되고 말았다.

그녀의 여러 사진들과 자화상을 보면 그녀가 즐겨 입는 긴 치마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자신의 다리를 감추려 했기 때문이다. 

어린 프리다는 주변 아이들의 놀림 속에서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해야 했다.

그녀의 가족중 프리다와 가장 친했던 언니 마티타마져 프리다일곱살 때 가출해 버린다.

이렇듯, 그녀의 유년 시절은 매우 고독했다.

의학도를 꿈꾸던 14살의 프리다는 멕시코 최고의 명문, 국립 예비 학교의 2,000여명의 신입생 중 단 30명 뿐이었던

여학생 중 한명으로 입학했고, 첫사랑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도 만난다.

그러나 1925년 9월17일, 18살의 프리다는 수업을 마치고 알레한드로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중 타고 가던 버스가

건널목에서 전차와 부딪히는 충돌사고로 인해 심한 참상을 당했다.

이 후유증은 평생을 두고 그녀의 삶을 짓이겨 놓았다.

 

 <붉은 옷을 입은 자화상>

 

 

프리다의 몸은 승객용 손잡이들이 달려 있던 쇠파이프에 몸 한복판을 관통당한다.

파이프는 옆 가슴을 뚫고 들어와 골반을 통해 이어진 질을 뚫고 허벅지로 나와 그녀가 살아있는 것이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하반신이 마비되어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된 프리다석고틀 속에서 꼼짝없이 갇혀 지낸다.

고통 속에 보내던 프리다는 무언가를 해보기로 결심하고,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를 위해 천장에 거울을 설치해 주고 침대에 부착할 수 있도록 특수 이젤을 제작해 준다. 

프리다가 훗날 "나는 병이 난 것이 아니라 부셔졌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은 행복했다."고 술회했던 대로,

그녀에게 그림 그리기는 모르핀으로도 달래지지 않는 고통을 달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프리다는 첫 작품인 <자화상>을 알레한드로에게 보냈다.

그후 프리다는 알레한드로와 연인사이가 아닌, 친구로 평생을 서로를 지켜보게 된다.

 

  

 <나의 사랑 디에고>

 

 

남편 디에고와의 만남은 1923년 디에고가 멕시코 시티 국립 예비학교에서 교육부가 주문한 프레스코 벽화

 <창조>작업을 하고 있을 때 이루어졌다. 

꽤 이름난 화가였던 디에고가 벽화 작업을 하고 있을때, 갑자기 작업장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면서

한 소녀가 떠밀리다시피 작업장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먼 훗날, 이날의 순간을 디에고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녀는 보기 드문 품위를 지녔고,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눈에는 기묘한 불길이 타오르고, 가슴은 봉긋 솟아오르기 시작해 아이 같 지 않은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날, 이 어린 소녀  프리다디에고에게

"당신이 일하는 모습을 좀 더 지켜보고 싶으니 작업을 계속하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1929년, 22살의 프리다는 42세의 디에고와 결혼한다.

세번 결혼을 하는 디에고를 두고,

프리다의 친구들은 스무살 이상 나이차와 디에고의 복잡한 여자 관계를 이유로 열렬히 반대했으나,

프리다의 아버지는 그녀의 치료비로 인해 재정적인 압박을 받고 있던 터라 순순히 승낙하게 된다.

 

 

                                                                                                                               <디에고와 나>

 

 

결혼 후, 그녀는 그림을 그만두고 남편을 위해서만 봉사하였으며,

디에고가 추구하던 원주민과 멕시코의 토속성을 직접 집에서 실천했다.

1930년, 프리다는 23세에 첫 임신을 했지만, 끔찍했던 교통사고와 선천성 자궁 이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된다.

한편, 디에고는 공산주의자들이 자신을 부르주아화 되었다며 비난하자 스스로 탈당하고,

프리다도 뒤를 이어 탈당한다.

디에고의 벽화 작업으로 인해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두번째 아이를 임신한 프리다디에고에게 아들을 선사하고 싶었으나 디에고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

아이는 다시 건강상의 이유로 유산하게 되고, 그녀의 어머니는 폐암으로 사망한다.

디에고마저 다시 방탕한 생활을 시작해 프리다는 심한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떠있는 침대>

 

 

26세에 디에고의 벽화작업으로 뉴욕으로 가지만, 5월 벽화 중앙에 들어간 레닌의 초상화가 문제되어

록펠러센터의 프레스코 벽화가 파괴되고, 멕시코로 다시 돌아가는데 상황은 더욱 나빠진다.

난소 발육 부진으로 세번 임신 석달 만에 다시 중절 수술을 하게 되고,

그리고 오른쪽 다리 수술과 발가락을 잘라내고 병원에 있는 동안,

여동생인 크리스티나가 자신이 형부인 디에고와 매우 깊은 관계임을 고백한다.

그때, 프라다의 나이 27세였다.

단숨에 모든 것을 잃은 프리다는 드디어 디에고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녀에게 고난은 이미 두려운 대상이 아닌 낯익은 존재였다.

그녀는 디에고가 좋아하던 긴 머리칼을 자르고, 테우아나 전통의상도 입지 않는다.

 

  

 

 

                                                                                                              <머리카락을 자른 자화상>

 

 

그녀는 이 때의 고통을 한 장의 그림으로 남겼다.

침대 위에는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는 여성이 있다.

침대 옆에 선 나이프를 든 남자는 피로 물들여진 자신의 옷 소매는 개의치 않고 당당히 말한다.

"그냥 몇 번 칼로 살짝 찔렀을 뿐입니다, 판사님. 스무 번도 안된다고요!"

사실, 디에고가 자신과 결혼한 여인의 여동생이나 가장 친한 친구와 바람을 핀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몇개의 작은 상처>

 

 

1935년, 28세에 디에고와 별거한 후

프리다는 일본계 미국인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디에고의 협박으로 그들의 만남은 끝나고,

프리다의 건강은 더욱 악화된다.

29세에 디에고와 화해를 하게되고 스페인(내전 발발)공산주자의 후원아래 연대의원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지만,

세번 다리 수술을 한다.

프리다는 31세되던 해에 프랑스 초현실주의 거장 앙드레 부르통을 만나게 되고

11월 뉴욕의 줄리앙 레비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지게 된다.

앙드레 브르통을 포함한 많은 작가들이 그녀의 작품에 진정한 초현실주의 작가라고 찬사를 보내지만,

프리다는 정작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실망하고 파리의 지식인들에게 얼마나 깊은 혐오감을 느꼈는지를

뉴욕에서 사랑하게 된 연인, 사진작가 니콜라스 머레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읽을 수 있다.

 

<그들이 어찌나 혐오스러운지,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에요. 정말 너무 하네요.

이 예술가인 척 하는 파리 멍청이들과 일을 하느니

차라리 시장 바닥에서 옥수수 부침개나 파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남미 화가로는 최초로 루브르 박물관에 그녀의 그림이 소장되었다.

32세에 프라다는 머레이와도 헤어지고, 디에고와도 별거, 이혼을 한다.

 

 

 

 <상처입은 사슴>

 

 

33세때 그녀는  멕시코, 샌프란시스코, 뉴욕에서 작품전시회를 왕성하게 하던 중,

몸의 치료를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가게되고,

레온 트로츠키 암살 사건으로 샌프란시스코로 몸을 숨기러 온 디에고와 만나게 되고,

디에고의 54세 생일날 여자 관계를 정리하고, 상대방에 대한 독립성 존중등을 조건으로 두 번째 결혼을 하지만,

디에고는 여전히 불성실한 남편이었다.

디에고가 그린 작품의 모델이며 프리다의 친구였던 영화배우, 마리아 펠릭스와 바람을 피우게 되는데,

이 시기의 프리다 작품<디에고와 나>에서는 그녀의 체념적인 상태가 보인다.

 

 

 

   <디에고 와>

  

프라다는 그 이후로도 반복하여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43세때는 총 일곱의 척추수술을 받으며

진통제로 하루하루를 이겨내면서도 그림 그리기는 멈춰지 않았고,

더욱 몰두하여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등 여러 미술관에 작품을 출품 하는 등

예술가로서의  절정기를 이루고, 대학 강의와 멕시코 공산당에  재가입 하는 등

휠체어에 몸을 실은 채, 바람 앞에 몸부림치는 불꽃처럼 더욱 치열하게 살아낸다.

 

 

 

 <희망의 나무여 우뚝 솟아라>

 

 

46세에 멕시코에서의 첫개인전이 현대 미술관에서 개최되는데 그녀는 침대에 실린 채 전시장에 참석한다.

7월 오른쪽 다리를 절단한다.

1954년, 47세에 폐결핵에 걸리고, 7월13일 불꽃 던 삶을 마감한다.

숨을 거두는 순간 친한 친구에게 디에고와 결혼해, 그를 보살펴 달라는 유언을 한다.

3년뒤 1957년에 디에고 리베라도 숨을 거둔다.

1958년 그녀가 살던 '푸른 집'이 프리다 칼로 미술관으로 개관한다.

 

 

 

 

                              <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 

 

 "나는 너무나 자주 혼자이기에, 또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에 나를 그린다."

 "사람들은 나를 초현실주의자 라고 하지만 나는 초현실주의가 아니다.

  나는 꿈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현실을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