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남는글..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습니다

나의 정원 2010. 9. 12. 11:06

 

 

 

 

 

 

열 아홉의 어린 나이에 장원 급제를 하여

스무 살에 경기도 파주 군수가 된 맹사성은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날 그가 무명 선사를 찾아가 물었다

"스님이 생각하기에 이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으로서

내가 최고로 삼아야 할 좌우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오?"

 

그러자 무명 선사가 대답했다.

"그건 어렵지 않지요.

나쁜 일을 하지말고 착한 일을 많이 하시면 됩니다."

 

"그런 건 삼척 동자도 다 아는 이치인데

먼 길을 온 내게 해 줄 말이  고작 그것뿐이오?"

 

맹사성은 거만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무명 선사가 녹차나 한 잔 하고 가라며 붙잡았다.

 

그는 못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스님은 그의 찻잔에 찻물이 넘치도록

자꾸만 차를 따르는 것이 아닌가.

 

"스님,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망칩니다."

맹사성이 소리쳤다.

 

하지만 스님은 태연하게

계속 찻잔이 넘치도록 차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는 잔뜩 화가 나 있는 맹사성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고,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십니까?"

 

스님의 이 한마디에 맹사성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졌고

황급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갈려고 했다.

 

그러다가 문에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그러자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습니다."

 

 

 

 

  

 

 

 

맹사성(孟思誠)

1360년 음력 7월 17일 ~ 1438년)은 고려조선 초의 문신.

고려 수문전제학 희도(希道)의 아들이며 명장인 최영(崔瑩)의 손녀 사위다.

 

온양 출신으로 1386년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춘추관검열이 되었고, 1417년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세종13년에 좌의정이 되어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청백한 선비로도 유명한 일화를 많이 남겼다.

황희와 함께 조선 초기 문화를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鄕樂)을 정리하기도 했다.

'태종 실록' 편찬을 감독했고, '팔도지리지'를 편찬하였다. 

 또한 맹사성은 검소한 관리, 효자로 표창받아 정문이 세워졌으며 직접 쓴 작품에 유명한 강호사시가가 있다 .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으나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자문하였다 한다.

맹사성의 사람됨이 소탈하고 엄하지 않아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을 갖추고 대문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역시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조정에서 봉급으로 주는 쌀)로 하였고,

바깥 출입을 할 때에는 소타기를 좋아해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지혜로우면서도 청렴 결백한 맹사성의 성품은 요즘 사람들에게 더욱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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