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돌아보기..

여주 박물관, 신륵사, 세조대왕릉 (경기 여주) - 20170416

나의 정원 2017. 5. 19. 00:51



여주

경기도 동남부에 있는 시.

2013년에 시로 승격되었으며

 강원도, 충청북도와 인접하다.

남한강 연안에 넓은 평야가 발달해 있으며,

주로 쌀을 중심으로 농산물이 생산된다.

흔암리의 선사주거지를 비롯해 역사 유물이 많고

신륵사 주변으로 국민관광지가 조성되어 있다.



여주박물관

여주 역사의 고증자료 및 문화예술, 역사유물 등의 자료를 수집,보관,전시하고

 향토사를 조사,연구하여 교육자료로 제공함으로써

향토의식을 함양시키고 시민의 애향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1997년 5월 개관하였다.

심볼마크여주박물관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MIS(Museum Identification System)는

 마암(馬巖)에서 황마(黃馬)와 여마(驪馬)가 승천했다는 여주 지명의 유래가 되는 전설을 모티브로 디자인 하였다.

또한 황마와 여마를 상징하는 박물관 아래로 여주의 역사와 함께 흘러온 여강(驪江)의 생명력을 표현하였다.


















신륵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1379년 많은 전각을 신축하고 중수했으며

1382년 대장각 안에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발원해 만든 대장경을 봉안했다.
조선시대 때 억불정책으로 절이 위축되었으나 1469년 영릉의 원찰이 되었고

1472년 절이 확장되고 다음 해에 보은사로 개칭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671, 1792, 1858년에 각각 중수되었다.
현재 금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여주 신륵사 조사당(보물 제180호),명부전,적묵당,노전,칠성각,종각,구룡루,시왕전 등이 있다.

 또한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호),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보제존자석종(보물 제228호) 등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조사당

보물 제180호


보제존자석종비(우)

보물 제229호


보제존자석종(좌)

보물 제228호.

높이 190cm.

1376년 나옹이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에서 경상남도 밀양으로 돌아가던 중 신륵사에서 입적하자

1379년 각신과 각주가 절의 뒤편에 있는 봉미산 중턱에 묘역을 마련하고 나옹의 사리를 봉안한 것이다.

넓은 묘역을 마련하고 전면에 박석을 깔았으며,

그 위에 넓은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놓여 있는 2매의 판석 중앙에 석종형 부도를 안치했다.

기단의 정면과 좌우면 중간에 2단의 계단이 있고,

탑신은 위로 갈수록 완만한 타원형을 이루다가 어깨부분에서 수평을 형성하고,

그 위에 보주를 조각했다.

이 부도의 형식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원당형 부도와는 다른 것으로 라마 탑계에 속하는 특이한 형식이다.

이러한 계단탑 형식의 부도는 통도사와 금산사 등에 있는데

이러한 형식을 모방한 것으로 조선시대에 전개되는 석종형 부도의 선구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예이다.

보제존자석종앞 석등 (우)

보물 231호



다층 석탑

보물 제225호.

높이 300cm.

이 석탑은 2층의 기단부 위에 다층의 탑신부가 있어

기본적인 구조는 신라나 고려의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각 부재의 세부조형은 전혀 다르다.



다층 전탑

보물 제226호.

높이 940cm. 한강변에 있는 암벽 위에 건립된 것으로,

지대석 위에 화강석으로 된 7층의 기단이 있고 그 위에 높은 6층의 탑신부가 있다.

 기단 위에 탑신부의 받침을 마련한 것은 신라시대의 전탑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탑신부는 6층 부분만 높이와 너비가 급격히 줄어들었을 뿐 각 층의 체감률이 낮아 전체적으로 고준해 보인다.

각 층의 옥개는 옥신에 비해서 극히 간략화되어 있다.

 상륜부는 전으로 된 노반 위에 화강석으로 된 복발,앙화,보륜,보개 등이 얹혀 있다.

탑 북쪽에 있는 이 탑의 수리비에 "崇禎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이라고 씌어 있어서

 1726년(영조 2)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전탑이다.




세종대왕릉 (영릉)

  • 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 1469년(예종1)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으며
  •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 입지는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 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였다.
  • 이 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 세조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이곳 여주로 옮겨 왔다.
  • 여주로 천장하면서 원래의 영릉 터에 있었던 상석,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수, 신도비 등은 그 자리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