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전시 감상하기..

박수근 전 (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 20180626

나의 정원 2015. 6. 30. 08:04

 

오늘은 DDP로

국민화가 박수근 전을 보러 갔다.

디올정신을 먼저 보고

다음 전시장을 향해 걷고 있는데..

입구 계단에 앉아 있던

마스크의 한 남자가 다가왔다.

전시회 가냐며 묻고는

 대답도 하기전에

 초대권 한장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너무 고마워서 "대가라도.." 하니

됐다며 뒤돌아서 가버린다.

 

천사가 따로 있나..?

나도 그런 천사가 돼 바야지..

감사의 마음이 더해진

소박한 그의 그림들은

 오래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1914년 2월 21일 (강원 양구군)출생 ~ 1965년 5월 6일 (향년 51세) 별세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2002 문화관광부 선정 5월의문화인물
 
1962 제11회 국전 심사위원 

 

 

 

 

 

 

장남 박성남

하드보드에 유채 28x21cm, 1952

1947년생인 박성남(형이 어려서 죽어 장남이 됨)은 아버지가 이 그림을 그리던 때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가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 번 돈으로 마련한 창신동 당고개집으로 이사해 처음 그린 자신의 초상화이기 때문이다. 화가로 활동 중인 성남 씨는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2014년 가나인사이트센터)에 이런 설명을 달아 놓았다.

“전쟁으로 몇 번의 만남과 이별을 거듭하다 마지막으로 극적인 상봉을 한 후, 아버지는 가장 먼저 다섯 살 난 나를 앉혀 놓고 다시는 헤어지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나를 그리셨다. 이 그림은 그 시대를 살아온 이 땅의 모든 ‘아버지의 아들’의 초상이다.”

개구쟁이 아들을 5~6시간이나 모델로 앉혀 놓고 그렸다는 이 상반신 인물화에는 화가의 자식에 대한 애틋한 부정이 배어 있다. 박수근의 젊은 시절의 사진과 이 초상화를 대조해보면 장남 성남은 아버지의 이마와 입을 빼닮았다.

기름장수

하드보드에 유채, 29.3x16.7cm, 1953

기름병을 담은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가는 아낙의 뒷모습을 담은 이 그림은 작지만 애호가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행상으로 삶의 현장을 누비는 아낙의 뒤태에서 고단함이 묻어날 법도 한데 오히려 애틋한 정감이 배어 나와 보는 이들에게 향수를 안겨준다. 특히 두터운 재질이 형성되기 전의 초기 작품이어서 유채의 거친 붓질과 곡선의 윤곽이 살아 있고 조형적인 짜임새가 탄탄하다. 머리가 작고 어깨가 좁은 여인이 기름병이 담긴 바구니를 이고 있어 뒤뚱거릴 듯도 한데 두 손을 내린 채 걷는 형태에서 오히려 균형미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박수근도 이 작품을 아껴 1959년에 판화로 다시 제작했고, 시공아트 책표지로 사용하기도 했다.

우물가(집)

캔버스에 유채, 80.3x100cm, 1953

6.25전쟁으로 중단되었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가 1953년 다시 열리자 박수근이 서양화부에 출품해 특선을 차지했던 뜻 깊은 작품이다.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한 박수근은 18세 때인 1932년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입선하여 화가의 길에 들어섰으나 광복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활동이 단절되었다가 국전을 통해 다시 화가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박수근은 국전을 겨냥한 대작의 주제로 우리의 전통적 삶이 배어 있는 초가집을 택했고, 기법도 정통 화법을 따르면서 질감에만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농촌 마을 풍경은 박수근이 양구 시절부터 즐겨 그렸던 대상이었고, 그중에서도 그의 관심사는 순박한 사람들의 소박한 일상을 화폭에 담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앞으로의 ‘박수근 화풍’을 알리는 이정표인 셈이었다. 이때부터 소박한 주제와 굵고 명확한 검은 선의 윤곽, 흰색 회갈색 황갈색 주조의 두터운 질감에 명암과 원근감이 거의 배제된 특징적인 표현을 보이기 시작했다.

황토벽에 볏짚으로 이엉을 얹은 초가집 마당에서 우물을 긷고 빨래를 하는 아낙네와 소녀. 빨래가 널려 있는 마당 한켠에선 닭들이 모이를 쪼고 있는 일상의 풍경이다. 여기서 형태만 보면 재미가 없다. 색채에서 묻어나는 향토적인 정서와 작품 전체에 감도는 평온한 분위(아우라), 이런 친근한 생활의 정감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절구질하는 여인

캔버스에 유채, 130x97cm, 1954 

 

<절구질하는 여인>은 ‘박수근 화풍’을 떠올리는 대표적인 소재이다. 이 작품은 1954년 제3회 국전에 출품하여 입선한 작품으로, 대형 화폭에 아기를 업은 여인이 절구질을 하는 포즈를 밀도 있게 형상화했다.

절구질을 하는 여인은 박수근이 1930년대부터 즐겨 다루어 온 주제이다. 1936년 재15회 선전에 입선한 수채화 <일하는 여인>과 1936년 제17회 선전에 입선한 <농가의 여인>도 절구질을 하는 여인을 모델로 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 앞서 1952년에 소품으로 그린 <절구질하는 여인>도 아이를 업고 절구질을 하는 옆여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

박수근은 일을 하는 여인의 모습을 즐겨 그렸는데, <광주리를 이고 가는 여인>. <빨래하는 여인> 등 제목도 다양하다. 이 가운데서도 <절구질하는 여인>을 선전부터 많이 그려 온 이유는, 우리의 고유한 정서가 녹아 있는 향토적인 소재이자 사라져 가는 전통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고목과 여인

캔버스에 유채, 45x38cm, 1962

 

고목과 두 여인

종이에 연필, 18x11.5cm

박수근은 1960년대에 ‘나무와 여인’을 주제로 연작 형태의 그림을 그렸는데, 그중에서도 1962년 작품인 <고목과 여인>이 미디어에 의해 소개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거대한 기념비와 같은 고목 옆으로 광주리를 인 여인들이 걸어가는 모습에서 도란도란 이야기가 흘러나올 것만 같은 대담한 구도에 시대의 풍속이 담긴 대표작 중 한 점이다.

고목이나 나목을 중심으로 여인이나 소녀들을 배치시킨 연작들은 박수근 예술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자연과 인간을 절묘하게 공존시킨 구도에서 균형미와 긴장감을 보여주며, 나무가 있음으로 해서 고단한 일상이 치유를 받는 느낌을 주고 있다.

박수근의 <나무와 여인> 연작은 박완서의 소설 <나목>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인기를 모았다. 2011년 작고한 박완서는 2010년 갤러리 현대가 연 박수근 40주기 기념전 <국민화가 박수근> 카탈로그에 다음과 같은 회고담을 썼다.

“그가 그린 <나목>을 볼 때마다 내 눈엔 마냥 춥고 헐벗어만 보이던 겨울나무가 그의 눈엔 그리 늠름하고도 숨 쉬듯이 정겹게 비춰졌을까 가슴 저리게 신기해지곤 한다. 그의 그 시대에 대해 증언하고픈 강렬한 욕구가 어느 날 40세 평범한 주부를 작가로 만들었다. 그런 걸 왜 운명적 만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운명적 만남은 그가 나에게 화집을 펼쳐 보여주는 순간에 왔다. 내 생애에 그런 만남을 경험하게 해주신 신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무.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거,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랬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릉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박완서 소설 <나목> 중에서

골목 안

캔버스에 유채, 80.3x53cm, 1950년대

 

1950년대 서울의 골목 모습을 이처럼 낯익게, 이처럼 정겹게 그린 풍경은 흔치 않다. 기와집과 나목들이 늘어선 골목에서 아낙들은 대문 앞에 모여 정담을 나누고, 아이들은 길에서 놀고 잇다. 그 당시 서울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사진보다 더 포근하게 다가오고, 향수를 자아내는 이유는 박수근의 착한 시선과 숨결이 배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앙상하게 골격을 드러내고 있는 나무는 아직도 손끝이 시린 이른 봄의 대기감을 설명해준다. 골목에 나와 있는 아이들이나 여인네들의 밝은 색채가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해준다. ―박수근 45주기 기념전 도록에서

빨래터

캔버스에 유채, 37x72cm, 1950년대 

박수근 선생 100주년 기념전(2014, 가나인아트센터)에는 두 점의 빨래터 작품이 전시되었다. 하나는 이 작품이고, 또 한 점은 1959년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50.5x111.5cm 대작이다. 나중 그림이 국내 경매에서 45억 2천만 원이라는 최고가를 기록했다.

박수근에게 빨래터는 추억의 장소이자 그림의 좋은 소재였다. 그는 금성 마을의 빨래터에서 아내 김복순을 본 후 결혼하기로 마음먹었고, 우여곡절 끝에 평생의 반려자로 맞았다. 양구의 박수근미술관에 빨래터를 재현해 놓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빨래터는 마을 공동의 생활 터이자 만남의 공간이었다. 아낙네와 처녀들은 이곳에 나와 빨래를 하면서 세상살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정보를 주고받았다. 소박한 우리네 모습을 주제로 삼아 온 박수근에게는 군상(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그릴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빨래터> 작품의 구도는 대각선이다. 냇가에 나란히 앉은 여인들은 옷가지를 빨거나 방망이질을 하고 있다. 어떤 평자들은 박수근의 작품을 동작이 정지된 평면화라고 하나 <빨래터>만 보아도 동적이고 원근이 있으며 색채도 사용하고 있다. 마니아들은 박수근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인물의 표정이 보이고 대화가 들리는 듯하다고 말하는데, 이 작품에서도 여인네가 옆 사람을 보며 무언가 말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빨래하는 여인들이 노랑 분홍 옥색의 옷차림을 한 것으로 보면 시절은 겨울을 떨쳐낸 완연한 봄이다.

시장의 사람들

하드보드에 유채, 25x62cm, 1961 

박수근은 노상의 사람들 못지않게 시장의 사람들을 많이 그렸다. 물건을 팔고 사는 시장은 사람들로 늘 붐볐고 생활의 활력이 넘쳤다. 노상의 인물들은 한 명일 때도 있지만, 서너 명이 모여 있거나 집단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인물의 배치나 움직임이 훨씬 더 다양하다. 이 작품은 등장인물이 열 명이 넘는 군상으로,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변화 있게 배치했다. 언뜻 보면 정지된 화면 같지만, 인물들의 시선 방향이나 포즈가 제각각이어서 동적인 긴장감을 자아낸다. 벽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이 작품의 특징은 장터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화가의 관심은 인정과 삶의 진실에 쏠려 있다.

“가난한 삶을 아끼고 측은히 여기는 애정 어린 진실이 아버지 그림 구석구석에 배여 아버지의 모습이 곧 그림이 아닌가 생각한다.” ―박수근 45주기 기념전 도록에 실린 딸 박인숙의 글에서

모자

캔버스에 유채, 45.5x38cm, 1961

 

서양에는 유명 화가들이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그린 성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박수근의 이 작품은 서양의 성화와는 궤를 달리하지만 엄마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지순한 이미지를 발하고 있다. 엄마가 아기를 품고 젖을 물리고 있는 모습인데, 아기를 감싼 엄마의 팔이 커다란 원을 이루어 모성의 본능과 한없는 자애를 전달해주고 있다. 이 작품이 숭고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이유는 아내와 아이를 실제 모델로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박수근의 유화 중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꼽을 만한 걸작이다.

굴비

하드보드에 유채, 15x29cm, 1962 

양구 박수근미술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는 정물화로 갤러리 현대 박명자 대표가 기증한 작품이다.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는 두 점의 <굴비>가 선보였는데, 이 작품과는 여러 각도에서 비교된다. 기념전에 나온 두 점의 작품은 이 <굴비>보다 10년 앞서 1950년대에 그려진 것들로 화풍부터가 다르다. 기념전 작품들보다 양구 박수근미술관의 <굴비>는 데생의 견고함과 구도의 긴장감뿐 아니라 박수근 특유의 표면 질감이 바싹 말린 굴비의 묘사와 맞아떨어져 입체감을 더해주고 있다. 박수근을 위대하게 평가하는 것은 독학이면서도 이처럼 탄탄한 기초와 독창적 표현 역량을 지녔기 때문이다.

청소부

캔버스에 유채, 33,4x53cm, 1963

박수근의 인물화들은 거의가 여성들인데 이 작품은 몇 안 되는 남성 주제의 작품이어서 눈길을 끈다. 이 역시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지만, 1960년대 당시에는 서울 거리나 동네 골목에서 리어카를 끌며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리어카를 세워둔 채 잠시 휴식을 취하는 제복 입은 청소부 두 명을 그린 이 작품은 주제 선택이나 표현 방식에서 기존의 인물 그림들과는 차별화되는 역작이다. 어느 평자는 박수근이 현실 참여를 하지 않은 것을 비판했는데, 박수근은 섣부른 사회 참여보다는 진솔한 삶의 정경을 택했을 뿐이다.

아기 업은 소녀

하드보드에 유채, 34x17cm, 1960년대 

 

박수근의 인물화 중에는 엄마나 소녀가 아기를 업고 있는 작품들이 적지 않다. 어떤 이들은 궁핍한 시대의 궁상맞은 모습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전쟁 후의 각박한 세태에서도 가족이라는 소중한 공동체는 살아 있었고, 하루살이 고단한 삶 속에서도 내일의 희망인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러나 지금처럼 육아 도우미나 유모차가 없어 엄마들은 아이를 포대기로 감싸 업고 집안일이나 행상을 했다. 산아 제한이 없던 시절이라 동생이 태어나면 누이가 업어 키웠는데, 한창 놀고 싶은 나이에 동생을 등에 업고 돌보는 일은 힘들었지만 불평을 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낡은 사진첩이나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아이 업은 소녀의 모습은 박수근의 예술로 각인되어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계승될 것이다. 이 작품 역시 큰딸 인숙을 모델로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소재는 그 당시 우리나라 어디를 가나 눈에 띄는 것들이다. 다만 그가 이러한 대상들에서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아름다움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사랑에서였다. 이러한 주위의 하잘것없는 대상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애착이 있었기에 거기서 남들이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고, 이를 표현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오늘날 슬픔마저 느끼게 되는 것은 그의 작품 자체가 전달해주는 호소력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박수근 45주기 기념전 도록에 실린 이대원의 글에서

농악

하드보드에 유채, 54x31.5cm, 1960년대 

  

박수근은 1960대 원숙기에 농악을 주제로 한 작품을 여러 점 그렸다. 일하는 여인상이나 노상의 여인들과는 소재도 다르고 위아래 구도나 좌우 대칭 구도도 특이하지만 무엇보다 선의 묘사와 질감의 기법에서 원숙의 경지에 다다라 완성도가 높다. 인물화 중에서 가장 동적이고,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 농민들의 멋과 흥을 느낄 수 있다. 악기를 들고 위와 아래에 진행 방향을 달리한 율동적인 몸동작에서 박수근의 무르익은 회화성과 벽화를 연상케 하는 질감을 엿볼 수 있다. 우리의 고유한 멋과 흥취를 자유자재로 표현한 걸출한 작품이다.

유동

캔버스에 유채, 96.8x130.2cm, 1963 

박수근은 51세의 한창 나이에 작고했다. 연고가 없던 국전에서 추천작가가 되고 심사위원을 역임하면서 국내 화단의 평가도 높아졌고, 세계로 작품이 알려질 무렵에 병마가 그를 덮친 것이다. 집 앞의 마당에 앉아 공기놀이를 하는 소녀들을 그린 <유동>은 1963년에 완성한 대작으로 박수근이 타계한 그해 제14회 국전에 아내 김복순이 출품하여 남편의 유작을 세상에 알렸다.

백내장으로 시력이 약해진데다 음주로 인해 간경화가 오기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박수근은 국전 추천작가가 된 1961년(47세)부터 병세가 악화되기 직전인 1964년(50세)까지 4년간 작가로서의 전성기를 맞아 무르익은 필력으로 주옥같은 대작들을 남겼다. 국전 제10회 출품작 <노인>, 심사위원으로 활약한 제11회 국전 출품작 <소와 유동>(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제12회 국전 출품작 <악(樂)>, 제13회 국전에 생전 마지막으로 출품한 <할아버지와 손자>(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등은 그의 사후에 제14회 국전에 출품한 <유동>과 함께 박수근 예술의 결정체이자 우리나라 현대 회화의 유산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이 짧은 전성기의 작품에서 박수근은 할아버지와 아이들을 테마로 삼고 있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한 그는 아이들과 할아버지의 어울림을 통해 세대 간의 소통과 생명의 윤회를 표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박수근이 작고한 그해 소공동 중앙공보관에서 열린 유작전에 다른 78점과 함께 전시되어 유족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살아생전 개인전 한 번 못했는데 죽어서야 유작전을 열었기 때문이다.

귀로

하드보드에 유채, 16x34.5cm, 1964

박수근의 유작 중 가장 정감을 자아내는 작품이 ‘귀로’라는 제목을 단 말년의 풍경화들이다. 귀로라는 말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여인네들을 주변의 들과 길, 나무들과 조화시켜 전체적인 분위기는 <나무와 여인> 연작과 유사하다. 인물이 있음에도 풍경화라고 하는 이유는 자연이 주가 되고 사람들은 그 길에 순응하는 모습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잎을 떨군 나뭇가지들이 뻗어 있는 논둑길을 함지박을 인 여인이 아이를 앞세워 가고 있고, 화면 오른쪽에는 역시 함지박을 인 여인이 소녀를 앞세우고 걸어가는 이 작품은 박수근의 특기인 나무와 길과 여인과 아이가 한 화면 속에 어우러져 마치 오케스트라의 화음이 들리는 듯 평화로운 정경을 연출하고 있다. 하루를 마치고 돌아가는 엄마의 발길은 고단하지만, 엄마와 함께 집으로 가는 아이의 모습은 활기차 보인다. 이보다 앞서 1959년에 그린 <귀로>는 박수근의 장점을 한데 집약한 밀도 높은 작품이다. 특히 검둥개로 악센트를 살려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정경을 보여주고 있다. 1965년에 완성한 <귀로>도 아이와 엄마 뒤를 검둥개가 뒤따라 한 편의 서정시를 연상케 한다.

“아버님은 아주 작은 인정을 더욱더 좋아하셨고 고통 속에서도 서로서로 도와주려는 서민의 아름다움을 아셨습니다. 그분은 서민들이 말하는 소리를 마음으로 듣고 그것에 대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리고 그림을 더 자세히 보면 인내, 절제, 영원 등이 표현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하고 싶은 말씀이 들려오곤 합니다. ―막내아들 박성민의 글

꽃신

수채화, 종이에 연필과 수채, 20.5x30.5cm, 1962 

책가방

수채화 종이에 수채, 25x31cm, 1960년대 

 

꽃무늬가 그려진 흰 꽃신 한 켤레는 아내의 것으로 보이며, 파란 책가방은 딸 인숙이 동덕여고 시절 들고 다니던 것이다. 이 밖에도 <나무>, <춘일> 등 풍경화와 <과일쟁반>, <가지> 등 정물화, <무제>, <민화꽃> 등 꽃그림 수채화가 남아 있다. 수채화로 선전에 입선한 박수근의 수채화들은 사실적인 필력과 투명한 색감으로 유채화보다 한결 포근하게 다가온다.

 

노상

종이에 연필, 9.2x17cm, 1959 

나무가 있는 마을

종이에 연필, 17x26cm

 

1978년 금성출판사에서 펴낸 <박수근 화집>(1932-1965)에는 소묘 작품만 126점이 실려 있다. 박수근은 틈만 나면 연필로 나무와 사람과 꽃과 동물들을 스케치했다. 수채화나 유화를 그리기 위해 박수근이 얼마나 밑그림을 많이 그렸는지를 엿볼 수 있다. 박수근의 유려한 필력은 이 같은 소묘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정중헌 (한국예술정책포럼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문화부장, 문화 담당 논설위원으로 미술 분야를 30여 년간 취재하고 리뷰했다. 단국대 대중문화예술대학원 겸임교수, 서울예술대하교 부총장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예술정책포럼 대표를 맡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문화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저서로 천경자 평전인 <천경자의 환상여행>, <나무와 숲, 2006>과 공저 <산실의 대화>(평민사, 1978) 등이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미슬의 세계>테마로 보는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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