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ical music..

오펜바하의 자클린 추모곡

나의 정원 2011. 7. 11. 10:31

  

 

 

  

  

 

 이 곡은 14년간 병마와 싸우다 42세로 세상을 일찍 떠나버린 첼리스트 자클린 뒤프레를 추모하며 연주하는 첼로 독주곡입니다.

 이 연주 곡은 베르너 토마스(Werner Thomas)라는

 젊은 첼리스트가 19세기 오펜바하(offenbach)의 미발표 곡을 찾아내어 [자클린의 눈물]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곡입니다.

 베르너 토마스 연주합니다.

                                                              

 

 

 

 

 

 

 

재클린 뒤 프레는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여류 첼리스트였다.

16세에 런던에서 데뷔했다. 남성 연주자들 못지 않는 힘찬 연주와 확실한 테크닉과 풍부한 음악성, 왕성한 창조력을 지닌 천재 첼로 주자다.

1965년 BBC 교향악단과의 미국 연주 여행 때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여 선풍을 일으킨 후부터 엘가의 협주곡을 장기로 하게 되며, '뒤 프레의 엘가'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1967년에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바렌보임과 결혼하여 두 사람의 듀오에 의한 명반도 많이 만들어졌으나, 1971년 다발성 뇌척수 경화증의 증상이 나타나 73년부터 연주활동을 중단했다.

그 후는 교육활동을 하여 1978년에 맨체스터의 솔포드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를 받았다.

모두에게 사랑과 환호를 받았던 영광의 시간만큼 불치병에 걸려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신음했던 세월 역시도 길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 교수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클린느는 남부러울 것 없이 성장했다.

세 살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여러 악기 소리 가운데, 특히 첼로 음을 지적하며 그 소리를 내고 싶다고 졸랐다고 한다.

네 살 때 자기 키보다 큰 첼로를 선물 받고 다섯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첼로를 공부한 그녀는 런던의 첼로스쿨에서 W. 프리스에게 사사했고, 체르마트에서 해마다 개강되고 있었던 파블로 카살스의 마스터 클라스에서 기초를 다졌다.

이처럼 뒤 프레는 파블로 카살스와 토르틀리에, 그리고 로스트로포비치에게 사사해 어린 나이에 금세기 첼로계의 모든 흐름을 두루 섭렵할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16세가 되던 1961년 런던에서 공식 데뷔 무대를 가졌고, 1965년엔 BBC교향악단의 미국 연주여행에 독주자로 동행하여 큰 성공을 거두고 이름을 떨쳤다.

1966년에는 구 소련의 명 첼리스트 M.로스트로포비치의 가르침을 받고,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후 완벽한 정도의 기교와 풍부한 음악성을 지닌 그녀의 연주는 스케일이 크고 당당하여 세계적인 첼리스트로서 널리 각광을 받으며 활약하기 시작했다.

 


      생전의 자클린 뒤프레와 그 남편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그녀의 나이 23세이던 1968년에는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을 만났다. 지나치리만치 야심이 넘치는 바렌보임을 못마땅하게 여긴 뒤 프레 부모의 반대가 심했지만 결혼을 하게 되었다.

가족이 탐탁지 않게 여기던 다니엘 바렌보임과 결혼했던 뒤 프레의 불행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바렌보임은 뒤 프레의 명성을 이용해 출세가도를 달렸다. 자신의 음악회에 아내를 협연자로 등장시켜 청중을 열광시켰다.

그러나....

28세 되던 1973년, '다중경화증'이라는 희귀한 병에 걸려 사실상 연주 활동의 막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바렌보임은 뒤 프레가 병에 걸린 줄도 모르고 고통을 호소하면 정신력이 해이해진 것이라고 다그치며 화를 냈다.

연주를 그만둔 후의 뒤 프레의 삶은 더 비참했다.

   

  

다니엘 바렌보임과의 결혼이 재키(뒤 프레의 애칭)에게 음악적으로 좀 더 성숙할 수 있었고, 좀 더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렌보임에 의해 뒤 프레가 좀 더 많은 순회 공연과 바렌보임이 지휘자로서 초기의 캐리어를 쌓는 동안 협연자로 혹사당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어쨌든 뒤 프레가 다니엘 바렌보임을 사랑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유태인이었던 바렌보임을 따라 중동과 전쟁(6일 전쟁) 중이었던 이스라엘까지 날아가 이스라엘 교향악단과 협연한 사실만 하더라도 뒤 프레의 그에 대한 사랑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녀의 연주는 너무나 힘에 넘쳐 현을 끊어먹는 실수를 저지를 정도였다.

비평가들은 그녀의 연주에 대해 "그녀는 나를 미치게 만든다"라고 할 만큼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황홀함은 5년을 넘기지 못하고 불행이 그녀를 덮쳤다. 1970년 무렵 그녀는 눈에 띄게 피로해 하기 시작했다. 눈이 침침해질 때가 많았고, 손가락이 저리며 차가워지고 걸음걸이도 점점 더 볼품없어져 갔다.

병에 걸린 뒤 프레는 차츰 병의 증세가 악화되어 가고 있었음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뒤 프레는 아주 가끔씩 자신의 이런 증상을 남편에게 털아 놓았지만 바렌보임을 그녀의 병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직  바렌보임은 연주자 뿐만 아니라 지휘자로서의 명성을 쌓아가기 위해 혈안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것을 위해 뒤프레를 협연자로 혹사시켰다.

재키가 리허설이나 연습 때 자주 템포를 놓치게 되자 바렌보임은 그때마다 뒤 프레를 혹독하게 몰아 부쳤다. 이를테면 그녀의 정신력이 해이해진 탓이라고.

뒤 프레는 연주의 실수가 자신의 정신적 결함인 줄 알고 일주일에 5회씩 정신분석가인 월터 조피에게 진찰을 받으러 다니기도 했다.

그러는 중 그녀의 연주에 대한 악평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를 미치게 한다"던 그녀의 연주는 차츰 "일관성도, 논리성도 없는" 연주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서움에 빠졌다.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의 부인인 라이자 윌슨은 회고한다.

 "그녀 혼자서 외출하는 일이 잦았다. 쇼핑을 하거나 들판을 거닐거나 했다. 그러다가 넘어지면 지나가는 사람이 도와줄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 뒤프레를 남편은 화만 낼 뿐이었다."

결국엔 길을 걷다 도로변에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병원으로 실려가는 지경이 되었다.

병세가 너무 악화된 뒤 프레가 연주 중에 활을 놓쳐 버릴 지경이 되어서야 찾아간 병원에서 그녀가 '다중경화증'이란 희귀한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뒤 프레는 오히려 안도의 숨을 쉬었다고 한다.

정신병자가 아닌 것을 알 게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1987년,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병실에서 오랜 투병 생활로 지친 42년간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그녀의 연주는 남성에 뒤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힘과 넘치는 표현으로 마치 톱질이라도 하는 듯 힘찬 보우잉과 순진하고 솔직한 동작으로부터 발산하는 순수한 열정이 돋보인다는 평이다.

그녀는 병에 걸리기 전까지만 해도 항상 웃음을 간직한 낙천주의자였고, 자신감에 넘쳐흘렀으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활달하기까지 했다. 그녀의 그런 낙천적 성격과 자신감이 그녀의 연주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는 듯 했다.

이런 그녀의 연주를 한편에서는 자신을 활활 태워 만들어 낸 음악이라고 했고, 다른 한 편에서는 한 인간이 평생을 두고 써야 할 수명과 기를 짧은 기간에 소진했기에 때 이른 죽음을 맞이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그녀의 연주는 스케일이 크고 열정적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잃어 버릴 것이 없을 만큼 아무 것도 갖지 못했다. 최후의 비참했던 연주회로부터 시작하여 두 다리, 양팔 그리고 몸 전체의 균형을 잃었고, 사물이 두 개로 보일 지경이어서 책도 읽을 수가 없었다. 전화의 다이얼을 돌리는 일도, 돌아눕는 일도 그녀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심지어 1975년 이후로는 눈물 샘이 말라 눈물을 흘릴 수도 없게 되었다. 남편 바렌보임을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찾지 않았다.

뒤 프레는 아무도 없는 밤에 혼자 절망에 떨며 아는 사람들에게 간신히 전화를 걸어 자신에게 와달라고 조르곤 했다. 뒤 프레는 병으로 쓰러져 휠체어에 앉아 보내던 시절 이렇게 고백했다.

“첼로는 외로운 악기다. 다른 악기나 지휘자가 있는 오케스트라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첼로로 음악을 완성시키기 위해선 음악적으로 강한 유대를 가진 보조자가 필요하다. "

뒤 프레의 전기 작가 캐롤 이스턴은 읽기도 말하기도 힘들게 된 말년의 뒤 프레는 자신이 연주한 엘가의 협주곡을 틀어놓고 멍하게 있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들을 때마다 몸이 찢겨 나가는 기분이 들어요.……눈물 조각처럼"

그러곤 고개를 떨구고서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죠?"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죠?"

 

이렇게 생을 마감한 자클린 뒤 프레는 남편이 한 번도 찾아주지 않는 무덤에 지금 홀로 누워있다.

 

            

 

 

                                                                            

 자클린 뒤프레가 직접 연주한 곡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입니다.    (Beethoven-Cello Sonata No.3 in A major, Op.69 )

Jacqueline du Pr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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