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그림,작품들..

로베르 드와노 (Robert Doisneau )

나의 정원 2011. 2. 17. 11:33

 

Robert  Doisneau 



1950,    시청 앞 키스 사진............원본 15만 5천 유로 (2억원) 낙찰


1952   피카소




첼리스트





1953




카바레 쁘여발콩에 있는 파리야경 관광객들




카페

 



건물 관리인 뤼씨안느 집에서




푀플리에가(파리13구)



 
 The Fallen horse, Paris, 1942




1945

 



1946


 



 Sidelong glance, Paris, 1948




1950




1951




Wanda wiggles her hips, Paris, 1953




1953

 


 


 


 


  


  

 


 

 



 


 

 


 Mademoiselle Anita, Paris, 1951











로베르 드와노

드와노는 파리 외곽의 쟝티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와 계모, 그리고 의붓 형제는 숨막힐정도로 예의바르고 품위 있었으며 드와노는 이를 혐오했고,

십대에 빌린 카메라로 자신의 방과 그 숨막히는 고상함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는 사진을 촬영했다.

그는 당시의 다른 사진에서 쟝띠와 파리 사이의 집시 등이 거주하던 버려진 '지역 (zone)'이라 불린 곳의 산만한 모습을 담기도 했는데,

이는 자신의 가정환경과는 달리 억압적인 질서가 붕괴된 장소임을 강조한 사진이었다.

가족들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육군 소령이자 시 행정관이었던 삼촌이 첫 번째로 그에게 시의회 간행물의 사진을 찍으라는 임무를 준다.

 그는 다시 카메라를 빌려서 촬영했으나,

 시의회 직원 임금의 3배에 달하는 금액을 받게 되었고,

 이는 정확히 새 롤라이플렉스(Rolleiflex) 카메라의 가격과 같았다.

그는 20년이 넘도록 거의 대부분 이 카메라만을 사용했다.

드와노는 13세부터 17세까지 실업학교에서 석판화를 배웠고,

이 시기의 교육을 통해 배운 그래픽적 디자인은 그의 많은 작품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암실과 사진 스튜디오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고,

사진작가인 루시앙 쇼파르의 어시스트로 일하게 되며,

그는 드와노에게 스튜디오의 감독 자리를 위임한다.

드와노의 1930년대 초기 작품은 만 레이, 브라사이 등 당시 파리의 작가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의 초기 광고 작품은 깔끔하고 단순하며 현대적이었다.

그는 파리의 광고 사진작가인 앙드레 비노의 스튜디오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하게 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사진 경력을 넓힐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세에 비노의 스튜디오에서 미술과 문학 분야의 중요 인물인 만 레이, 프레베르 형제, 뒤피 등을 만나게 되면서

 자유분방한 생활 방식을 접하게 되고 사고와 표현의 자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군 제대 후에 직장을 구하지 못했지만

 르노 자동차의 사진 부서에 있던 쇼파르가 그를 고용하여 그에게 안정적인 기술적 기반을 제공했다.

1937년 그가 이사한 예술가들을 위한 몽트루쥐의 원룸 아파트는

그의 고향인 쟝티와 가까운 거리였지만 유년기의 프티 부르주아적 환경과는 거리가 먼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드와노는 이곳에서 평생 살게 된다.

그는 르노에서 보통의 프랑스 노동자들을 접하게 되고,

당시 좌익 정당인 '인민 전선 (Popular Front)'에 대한 투표에 대한 기대가 노동자들 사이에서 크게 높아지고 있었다.

그들은 임금과 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하고 공장을 점거했고 드와노도 여기에 말려들어 파업 회의에 참여하게 된다.

이는 그에게 있어 정치적으로 최초의 전환점이었다.

그는 사회 사건에 무관심한 전형적인 프티 부르주아의 삶을 거부하면서 경영자 측에 서지 않고 노조에 가입했다.

그는 라포 (Rapho) 사진 에이전시에 자신의 사진을 보였고,

반응이 좋았지만

에이전시는 드와노가 예측 불가능한 프리랜서의 매력 때문에 정규 임금직을 거부한다는 것임을 알았다.

그는 르노에서 계속 일했으나 사진 작업에 더 많은 시간을 쏟으며 집의 암실에서 늦도록 일했는데,

특히 까다롭고 매우 긴 작업 과정을 요구하는 '트라이 크롬 카브로 (tri-chrome carbro)' 색채 과정을 위해 일했다.

르노는 직장에 지각을 일삼고 파업에 동참하여 회사를 배신한 드와노를 해고했으며,

그는 지루하고 안전한 일상에서 벗어나 프리랜서의 모험적이고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보병 군대에 소집되었고,

병에 걸린 그는 병가를 얻어 파리로 돌아왔다.

그와 그의 가족은 몽트루쥐로 다시 이사했고 드와노는 사진 엽서를 만드는 등의 작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독일 점령 하의 파리는 매우 어려운 상황을 겪었고,

 드와노는 점령의 영향을 촬영한 수작을 이 시기에 남겼다.

그 중 한 작품은 얼어붙은 거리에 넘어진 흰 말을 둘러싼 무관심한 군중 또는 말을 도우려는 사람들을 보여주는데,

 흰 말은 물론 프랑스를 상징했다.

이 시기에 그는 레지스탕스와 함께 일하면서 그의 사진, 그리고 판화기술을 이용하여 여권과 신분증을 위조했다.

발각되면 추방되거나 강제 노동수용소로 보내질 만큼 위험한 일이었으나,

다행히 운 좋게 피해갈 수 있었다.

전쟁 기간 동안 필름을 구하기는 힘들었으며,

은의 부족현상으로 인해 필름과 교환할 은을 구할 필요가 있었고 원료 부족으로 인해 액자의 사용 또한 주의해야했다.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했을 때에 필름 두 롤만을 지니고 있던 드와노는 이를 잘 활용하여,

샹젤리제를 큰 보폭으로 걷는 드 골 장군의 모습을 포함해 이 사건에 대해 가장 널리 알려진 사진들을 촬영했다.

세계 대전 종결 직후에도 파리의 사정은 어려워서 종이 부족으로 인해 잡지사들은 한정판만을 발행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몽 그로세가 라포 사진 에이전시를 다시 설립하려 했고,

드와노는 함께 일하기를 원했다.

바로 매그넘을 설립하려는 작가들로부터 동참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에 그는 이를 거절하고 라포에서 일한다.

 매그넘은 그에게 세계를 여행하며 국제적 명성을 얻을 기회를 제공해주었을 테지만,

이를 위해서는 파리를 떠나 가족과 떨어져 창조적 원천을 잘라내는 대가를 치러야 했을 것이다.

그는 런던과 뉴욕, 헐리웃, 그리고 50주년을 맞은 소련 등을 여행하며 사진 작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최고의 작품은 프랑스, 특히 파리에서 촬영된 것이었다.

1950년 라이프 지의 '파리의 젊은 연인'이란 과제를 통해 그는 그의 대표작인 '시청 앞의 키스'를 남겼다.

이 작품에서 강조된 것은 순간성으로,

그는 의도되지 않은 장면을 포착했다는 느낌을 강조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얕은 심도, 느린 셔터 속도 등의 기술적 결함을 이용했다.

드와노의 작품은 대부분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는데,

보통 그가 알고 있는 사람들로, 보기에 보도사진 같은 작품들은 그의 지인들이 포즈를 취함으로써 만들어졌다.

연출되지 않은 실제 상황을 포착한 '비스듬한 시선(The Sideways Glance)' 시리즈는

친구가 운영하는 골동품 상점의 진열장에 화려한 여인의 뒷모습 누드를 전시하고, 가게 안에 숨어서 행인들의 반응을 촬영한 작품이다.

 또한 다른 친구는 그에게 파리의 노숙자 등의 존재를 일깨워주기도 했다.

이러한 인물들을 촬영하는 것을 통해 그의 최고 작품 시리즈를 완성했을 뿐 아니라,

 보그 (Vogue) 지에서 활동할 당시 패션 사진의 스트레스로 부터 그를 보호해주기도 했다.

드와노의 수작들 중 대부분은 유년기부터 사용한 롤라이플렉스로 촬영되었으나,

그는 1950년대 부터 광각 장비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는 롤라이 대신 하셀블라드를 사용했듯이, 라이카가 저광 작업에 유용하며,

교체 가능한 광각 렌즈와 망원 렌즈를 제공하여 다양한 구성을 취할 수 있기에 사용하다가 후에 35mm SLR 카메라로 작업했다.

1960년대에 드와노는 파리가 파괴되고 있음을 느끼고,

사라지기 전에 남아있는 것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그는 예전의 관심사였던 교외 풍경보다 도시 중심가를 집중적으로 살폈는데,

한 작품에서 그는 망원 렌즈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거리에 가득찬 차와 그 멀리 말에 탄 사람을 촬영했다.

드와노는 다양한 인화작업,

미술의 아상블라쥬 기법,

그리고 현대에 설치미술로 불리는 등의, 사진 외부의 영역을 사진에 이용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 드와노는 프랑스에서 계획한 워커 에반스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다타 (DATAR)라는,

30여명의 사진작가가 참여하는 전후 최대 규모의 다큐멘터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쟝띠 시행정기관의 위임으로 촬영한 사진들은,

처음으로 사진 작업을 한지 60년 이후인 그의 말년 1990-91년에

 그가 최신 장비와 소재를 사용하여 더욱 양질의 작품을 창조해냄으로써

여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를 선보일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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