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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 하우스의 실험무대(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20141231

나의 정원 2015. 1. 3. 12:05

 

전시소개

 

 바우하우스(1919-1933)는

 예술, 디자인 학교로서

 20세기 예술, 건축, 염직, 그래픽, 산업 디자인, 타이포그라피 등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바우하우스 학교는 모든 예술의 통합을 목적으로 하며,

사회 변화를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예술가들을 교육시키는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바우하우스 초기부터 구성원들은 금속, 직물, 디자인, 건축 등 여러 장르의 작업장에서

마이스터의 지도하에 현대기계문명에서 일상과 밀접하게 연관된 미술의 역할과 기능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바우하우스인들의 실험과 교육방법은 단순히 개인의 창의성과 능력 함양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바우하우스인들이 함께 참여하는 워크숍 교육을 통해 종합예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유도되었다.

특히 인간, 공간, 기계가 조화를 이루는 공간으로서 무대의 역동적인 역할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졌으며,

이를 위한 기초적인 실험의 놀이터로서 총체극장에 대한 연구가 초기부터 진행되었다.

무대공방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가 1921년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에 설립하였으며

1923년까지 연출가 로타르 슈라이어(Lothar Schreyer)와

 1929년까지 화가이자 안무가인 오스카 슐레머(Oskar Schlemmer)에 의해 지도되었다.
   발터 그로피우스, 오스카 슐레머, 라즐로 모홀리 나기,산티 샤빈스키,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등의

바우하우스 주역들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무대 위에서 인간, 공간, 기계의 새로운 융합을 실험하였다.

바우하우스인들은 기계적이고 추상적인 무대 세트, 의상, 인형, 춤과 장난스런 움직임, 빛과 소리에 대한 연구를 통해

현대에서의 인간 육체와 정신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바우하우스 무대실험의 특성은 “놀이가 일이 되고 - 일이 파티가 되고 - 파티가 놀이가 된다.”는

 요하네스 이텐의 말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바우하우스의 무대실험-인간,공간,기계>展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독일 바우하우스 데사우 재단이 2012년부터 공동으로 기획한 전시이다.

 이번 전시는 제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새로운 인간상에 대한 바우하우스의 실험을 다루는 전시이다.

 바우하우스의 건축, 디자인 전시는 자주 개최되었으나

이번 전시는 무대실험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첫 번째 전시이다.

전시는 제 1부 신체 조화, 제 2부 분위기 장치, 제3부 구성주의적 형상,

제 4부 신기한 무대기술, 제5부 조각적인 안무, 제6부 총체극장, 제 7부 집단 프로그램 등 총 7부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전시구성을 통해 예술의 다원적 접근을 위한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아이디어의 장으로서

 바우하우스의 특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창작과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고자 했던

 바우하우스의 경향이 21세기 오늘날 한국현대미술에서도 발견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김영나, 백남준, 안상수, 오재우, 조소희, 한경우 등 6명의 한국현대미술작가 작품을 함께 보여주고자 한다.

이들의 작품은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바우하우스운동이 일정한 시기에 일어났던 특정한 경향이 아니라

 예술가들 본연의 창작태도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서울관 홈피 펌

 

 

 

 

 

 

 

 

 

 

 

 

“당신은 정원이 있습니까?

도시에 살고 있는 현대인 중에서 이 질문에 ‘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실용적인 기능 뿐 아니라 심미적 감상기능과 더 나아가 정원을 거니는 동안 지친 마음이 편안하게 되며, 우리의 정신이 고양되고, 스스로를 반추해볼 수 있는 여유로운 유희를 함께할 수 있는, 마치 이상향을 소유한 것 같은 만족감을 줄 수 있는, 그런 멋진 정원을 갖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더욱 드물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1년 전, 도심 속 열린 문화공간을 지향하며 개관했다. 8개의 전시실에서 5개의 기획전으로 시작한 서울관은 개관전 이후 지난 1년 동안 16개의 다양한 전시와 행사들을 진행하며 건립목적에 부합하는 수준 높은 문화체험의 장으로서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도심 속 미술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울창한 초록빛 숲의 마중으로 시작되는 《정원》전은 이제 개관 1주년을 맞이하게 된 서울관이 국민들에게 이상적인 정원 같은 곳이라는 생각에서 마련되었다.

1. 만남. Encounter

“가슴 속에 만권의 책이 있고, 눈으로는 전시대의 명전을 두루 보며, 또한 수레바퀴 자국과 말 발자국이 천하의 반은 되어야만 바야흐로 붓을 댈 수 있다.

- 조희곡(趙希鵠, 남송, 1195년경~1242년경 활동)

동기창(董其昌, , 1555~1636)에 이르러 ‘만리의 길을 가고 만권의 책을 읽다(行萬里路 讀萬卷書)’ 로 표현되었던 이 말은 배우고 익히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얻는 모든 경험들 또한 예술의 근원이 되는 것임을 나타낸다.

‘만남’의 영역에서 관람객은 삶의 여정에서 겪게 되는 다채로운, 심지어 현란하기까지 한 우리의 경험을 반영하는 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생명과 사랑이 넘치는 환희와 기쁨이 있는 반면, 우울하고 광기로 가득 찬 모습들, 그리고 전쟁과 죽음에 이르는 상처의 기억에도 직면하게 된다.

2. Pause

산림과 정원에 거처하면서 자신의 천품을 수양하는 것은 누구든지 원하는 바이고... 속세의 풍진에 구속받는 것은 누구나 싫어한다. 안개 피어오르고 구름 감도는 절경속의 신선은 누구든 동경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눈과 귀가 보고 듣고 싶은 것에 단절되어 있으니, 훌륭한 솜씨를 지닌 화가를 얻어 그 산수자연을 멋지게 그려낸다면, 굳이 산과 정원을 찾지 않아도 그 경치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 곽희(郭熙, 11세기 초~11세기 말)

자연을 경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맑은 생명력을 그림을 통해 대신 얻고자 했던 바로 이 이유로 인해 북송대 화단의 주류는 인물화에서 산수화로 바뀌게 된다.

현란한 색채와 감정들의 폭주가 끝나는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쉼’의 공간은 장엄한 폭포 아래 펼쳐지는 울창한 흑백의 숲을 통해 번잡했던 호흡을 내려놓고 폐 깊숙이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 같은 환기의 경험을 제공한다. 이미지와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어쩌면 우리는 이제 산수화를 즐겼던 옛 사람들처럼 그림을 통해 우리의 긴장을 내려놓고 쉬게 하는 자연의 기()를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3. 문답 Dialogue

숲을 지나 들어가는 어두운 공간에서, 18세기의 조선의 괘불과 21세기 미국의 미디어 작가의 작품이 서로 마주보며 공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법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마련된 야외의식에서 사용되는 ‘거는 불상’인 괘불은 전 세계 단 세 나라, 티벳, 몽고 그리고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매우 희귀한 문화유산이다. 이 공간에 등장하는 괘불은 석가모니로 알려져 있다. 꽃을 들고 있는 장면은 ‘염화시중(拈華示衆)’ 이라는 유명한 일화를 배경으로 한다.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설법 중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는데, 석가모니가 떨어진 연꽃 한 송이를 사람들에게 말없이 들어보였을 때 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미소 지었다는 이야기의 한 장면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침묵으로 이루어진 문답의 예로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거대한 괘불과 함께 제시되는 미디어 영상은 켈트족의 전설인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바탕으로 만든 바그너의 오페라를 위해 제작된 빌 비올라의 <트리스탄의 승천> <불의 여인>이다. ‘트리스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들은 고속촬영기법에 의한 시간의 지연과 웅장한 사운드를 이용한 미디어 작품들로 숭고함과 장엄함을 느낄 수 있다.

이 작품들은 한 공간에 있으나 순차적인 조명으로 인해 동시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마치 한 쪽이 질문을 던지고 사라지면, 다른 한 쪽이 답하기 위해 등장하듯이. 문답은 작품들 간에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원》을 관람하는 사람들 또한 이 문답에 동참하며 자신의 내면의 질문과 직면하게 될 것이다.

4. 소요유(逍遙遊) Wandering at ease

소요유는 얽매임 없이 여유로운 것을 의미하는 ‘소요하다’와 ‘유()’를 한 단어로 결합한 장자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영혼의 정화와 정신의 해방, 도의 체득을 함께 아우르는 이 유희는 장자미학의 중요한 요소이다.

《정원》의 출구를 향하는 ‘천원지방(天員地方)’의 연못의 형태를 닮은 전시의 마지막 영역은 MMCA 소장품 명품선으로 준비되었다. <우리는 혁명이다>라고 외치는 요셉보이스의 작품과 오랜 벗을 상징하는 로봇을 타고 청산으로 유유히 날아가는 서은애 작가의 유괘한 상상이 펼쳐지는 작품들이, 서사를 거부한 단색화 작품들과 한 공간에 공존하며 가운데 둥근 섬을 차지하고 있는 “예술은 사기다”라고 말했던 백남준의 작품들을 바라보고 있다. 1950년대 작품으로부터 최근의 작품들로 구성된 국내외 작가들의, 어떠한 공통분모로도 수렴되기 어려운 다양한 작품들이 펼치고 있는 유희들에 동참하며 전시장을 걷는 행위는 마치 작가들의 다양한 상상력과 감성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유유히 헤엄치는 것과 같은 경험이 될 것이다.

당신은 쓸모 있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당신의 삶을 담아내며, 지친 일상의 호흡과는 다른 숨을 쉴 수 있게 하고, 당신 내면의 숭고함과 깊은 질문에 직면할 수 있게 하는 질문을 던지는, 또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그래서 당신의 영혼과 정신이 고양되며 막힘없이 자유롭게 소요할 수 있는 그런 정원을 가지고 있습니까.

《정원》전은 이 물음에 대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대답이다.

“당신에게는 그런 정원이 있습니다.”   

 

 서울관 홈피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