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성벽
명나라 초기에 당나라 장안황성의 기초 위에 건조한 것이다.
이후 또 수차례 중수 공사를 거쳐, 방어체계를 구축하였고,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고성벽이 완료되었다.
1961년 시안성벽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에 의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오늘 날의 서안성벽은 명나라 초기에 건설된 것이다.
당나라 말기 뤄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원래의 도성인 당장안성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명나라 초기 주원장에 의해 둘째 아들 주협이 진왕으로 봉해졌고, 서안부를 두었다.
홍무 7년인 1374년에 서안장벽의 재건공사가 시작되었다.
장벽을 중간할 때 서, 남 양쪽은 원래의 당나라 장안성 황성의 터 위에 성을 연장하여 만들었고, 동쪽 벽과 북쪽벽은 새롭게 만들어졌다.
이 공사는 1378년 홍무 11년까지 8년을 진행하여 기초를 완공하였다.
그 후 1568년 융경 2년 장벽 위쪽 공사와 외벽쪽의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1636년 명나라 말 숭정 9년 섬서순무 손정정이 이자성의 반란을 막기 위해 네 문의 옹성을 추가로 만들었다.
1643년 숭정 16년 서안을 공격했고, 다음 해 1644년 이자성은 칭제를 하며 국호를 대순이라 칭하였다.
청대에 이르러 명나라 때 기본골격을 따랐고, 열 두차례에 걸친 중수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은 건륭제 46년인 1781년의 작업이며, 포와 해자를 추가하여 대다적인 방어능력을 향상시켰다.
성벽은 방어용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동서로 길쭉한 장방형이다.
동벽은 2,590m, 서벽은 2,631m, 남쪽 장벽은 3,441m, 북쪽 장벽은 3,241m로 전체 둘레 13.75km이다.
성내의 면적은 총 12평방킬로미터로, 당나라 장안성의 1/7 정도의 크기이다.
성벽의 높이는 12m, 아래에서 15~18m에 이른다.
서안성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성문이 있고, 각각 장악문(长乐门), 안정문(安定门), 영녕문(永寧門)과 안원문(安遠門)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
문 밖에는 옹성이 고르게 쌓여있다.
각 문은 3층으로 3중으로 나눠져 있고, 바깥이 안쪽을 향하게 되어있다.
와룡사(臥龍寺)
비림구에 위치하고 있는 섬서성 최초의 불교사원
중국불교 전래 초기인 한나라 건녕 원년(168)에 창건된 1,800년 고찰이다.
처음에는 복응선원이라 불렸으며 당대에는 관음상이 있었기 때문에 관음사라 불렸고,
송나라 때에 이르러 유과스님을 사람들이 와룡이라 불렀던 것이 계기가 되어 송 태종이 이 절을 와룡사라고 하였고, 편액을 내렸다.
명나라 때는 시방총림 겸 섬서성 최고 사찰로 알려졌으며,
이후 성쇠를 거듭하다가 1921년에 대대적인 수리로 선사들이 주석하는 유명한 선방이 되었다.
와룡사는 문화혁명 이전부터 지식인들의 출입이 잦고 수행자가 많이 살았던 관계로 사회주의자들로부터 탄압의 표적이 되었으며,
문화혁명 당시에는 거의 모든 당우가 파괴되는 등 심한 피해를 입었다.
심지어 당시 방장이었던 낭조 스님과 지객이었던 원철스님은 심한 고문으로 인해 입적했다고 한다.
1984년부터 경내지를 정부로부터 돌려받았으며, 대웅보전 등 전각과 당우가 복원되어 규모 있는 사찰로 도량을 정비하였다.
문화혁명 때 파괴된 선방도 신축하고, 현재 30여 명의 선객들이 수행하고 있다.
서태후가 의화단 사건으로 황제와 피신을 와서 머물렀으며 ,당시 허운스님도 이곳에 머물렀다한다.
비림(碑林)
서안의 삼학가(三學街)에 자리잡고 있는 섬서성 비림박물관 내에 위치하고 있다.
북송 철종(哲宗)년간(1090년)에 처음 지어져 현재까지 9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비림은 현재 7개의 대형 진열실과 8개의 회랑 그리고 8개의 비정(碑亭)에 한대부터 청대까지 2300여 개의 비석을 수장하고 있으며,
그 중 1000여 개를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전서,예서, 초서,행서 등의 각종 서체를 비교할 수 있으며 유명 서예가들의 필체를 직접 감상할 수 있다.
비림은 중국 고대 서예 예술의 보고이자 고대 문헌서적과 비석의 조각 도안 등이 집대성되어 있는 곳으로,
대외 문화 교류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유적지이다.
비림의 입구에 있는 현판에 쓰인 碑林이라는 한자에는, 아래 사진에서 처럼 碑자의 卑에서 획(점)이 하나 빠져 있다.
이 현판은 청나라 시절 임칙서 장군이 쓴 것이다.
그는 1840년에 일어난 미국과의 아편전쟁 당시 광동성으로 가는 도중
서안에 왔다가 비림의 현판을 쓰면서 전쟁에서 승리하면 서안에 돌아와 점을 마져 찍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전쟁에서 패한 후 남경조약이 체결된 뒤 신강성에 가서 죽게 되어, "비"자는 아직까지 점이 빠진 채 그대로 남아 있단다.
비림 비각안에 있는 석대효경비- 당현종이 효경을 직접써서 비석으로 새겨놓은것
대하석마 - 장안현 사가채에서 출토된 석마로 진흥 6년 당시의 묘앞에 있는 석각의 하나로 추정된다.
왕희지 안진경 등의 친필 비석들이 전시되어있다.
공자상
관제시죽 - 관우가 조조의 포로가 된 유비에게 보낸 관제시죽, 대나무 잎이 글이다. (좌)
집자괴성점두도 - 왼손에는 벼루를 오른손에는 붓을 들고, 왼발엔 두자를 받치고 있고 오른발은 오자를 밟고 있다. 우)
탁본과 티셔츠로 만들어 팔고있다.
비각
경운종 - 장안성 종루에 있던것을 옮겨온것으로 중국에선 천하제일종이라 부르며
종 중앙에는 당 예종의 친필로 도교와 종소리에 대한 찬미가새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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