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cing Family
Family
Family with Doves
Two kids playing with Fish
자화상
이중섭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돌아 온 작가입니다. 43~44년도 즈음에 귀국했을 때는 전쟁말기였고, 사회적으로 상당히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고향인 원산으로 돌아 온 이중섭은 자신의 대학 후배인 일본 여학생과 사랑을 하게 됩니다.
이 여학생은 부모의 반대를 무릎 쓰고 이중섭을 만나기 위해 일본에서 원산까지 찾아오고 이 두 사람은 1945년에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혼과 함께 해방이 되면서 북한쪽은 소련이 진주하면서 당시 북한에 체류하고 있었던 당대의 많은 미술인들에게 이른바 사회주의적인 리얼리즘, 즉 사할린,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공산주의의 이념을 선전, 선동적으로 그리게끔 강요를 했습니다.
얼마 후에 한국전쟁이 터지고 나서 이중섭은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아들 둘을 데리고 고향을 뒤로 한 채 월남을 하게 됩니다.
이중섭은 5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이중섭에게 있어 어머니는 굉장히 큰 존재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기록에 보면 이중섭은 중학교 때까지 어머니의 젖을 만지면서 자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전쟁과 사회적인 상황은 이중섭의 생활을 완전히 뒤집어 놨습니다.
그가 월남해서 부산 피난민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는 가족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어떤 수단도 없었고, 부인과 아들 둘은 영양실조로 죽기 직전이었습니다. 이중섭은 할 수 없이 일본인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에 보내게 됩니다. 비록 헤어지지만 일본에 보내서라도 가족을 살리고 싶었던 마음이었습니다.
1952년에 가족을 일본에 보내고 1956년 이중섭이 죽을 때까지 가족을 잊지 못해 가족을 그렸던 작품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중섭은 가족 구성원 속에서만이 존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너무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두 아들에게 만큼은 ‘아버지 있는 가족’을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그는 경제적으로 너무 무능했었고, 당시 한국전쟁 이후의 상황은 너무 피폐했었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간 부인과 두 아들을 만나지 못해 죽을 때까지 가족을 그리워하면서 그렸던 엽서 그림들이 오늘날 남아 있는 이중섭 작품의 전부입니다.
52~56년도 죽을 때 까지 그렸던 그림들은 한결 같이 원형으로 부인과 자신, 두 아들이 뭉쳐 있는 원형구도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원형구도라는 것은 누구도 개입될 수 없는, 끼어들 수 없는, 오로지 가족 구성원의 결속력을 단단하게 보여 주는 그림입니다.
전쟁 중에 이리 저리 피난을 다니면서 이중섭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재료를 구할 수도 없었고, 먹고 살 수 있는 여력도 없었을 때 애타게 가족을 그리워하면서 편지지나 엽서에 수 없이 많은 편지와 그림들을 그려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중섭은 결국 가족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일본에 있던 이중섭의 장모는 ‘이중섭에게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일본으로 와서 가족을 부양하기를 원했지만 이중섭은 그런 면에서 무능한 자신에게 낙망(落望)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가 되지 못하고 가족을 이끌어 나갈 경제적 능력이 부재했었던 당시의 이중섭은 자학을 합니다. 그는 매일 술을 마시고, 가족과 헤어져 있는 자신을 한탄만 하다가 결국은 죽습니다. 1956년 9월6일 별세. 그의 나이 4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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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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